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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천뉴스24와 영천역사박물관이 함께하는 '영천문화유산 되찾기' 운동 ① : 정세아(鄭世雅)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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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영천역사박물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63회   작성일Date 22-10-05 16:0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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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정세아 편지>, 조선 1582(임오).12, 종이에 묵서, 36.7 × 39.5cm. 영천역사박물관.



    • 명 칭 : 정세아(鄭世雅,1535년~1612년) 편지

    • 제작연대 : 1582(임오)년 12월 24 

    • 재 질 : 닥나무 종이에 묵서

    • 크 기 : 세로 36,7 × 세로 39.5cm


    정세아(鄭世雅)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590년부터 풍계 조덕기와 함께 영천이 전쟁(임진왜란)을 대비하고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의 어른이다.

    생몰년은 1535년(중종 30)~1612년(광해군 4년)이다.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叟). 영천(永川)에서 세거(世居)하였다. 오천정씨 정종소(鄭從韶)의 16세 현손으로, 아버지는 참봉 정윤량(鄭允良)이다.


    현존하는 정세아의 유묵은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 목록집 47호 '영일정씨 매산종택'에 의하면 5점 정도가 남아 있다. 선조친필(先朝親筆)로 기록된 임오(1582년 1월 22일)년 관찰(편지)과 경술(1610)년 1월 23일 · 5월 11일 두 차례 받은 사람이 기록되지 않는 수취자 미상(受取者未詳)의 편지 2점과 을미(1595)년과 경자(1600)년 차남 정안번 · 삼남 정수번에게 보낸 간찰 등 총 5점이 '호수유묵(湖叟遺墨)'에 첩장되어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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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영일정씨 매산종택(2018.4),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자료 목록집 47호, p32-33.


    선현유묵에 첩장된 1595년 · 1600년 차남 안번과 삼남 수번에게 보낸 두 차례의 편지.

    영천역사박물관에서 이번에 되찾아온 정세아(鄭世雅) 편지는 ‘壬午至月卄四日 服人 鄭世雅 頓’로 보아 임오년 12월 24일 상복을 입은 정세아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부친인 정윤량(鄭允良, 1515~1580)의 삼년상을 마치는 해인 1582(임오)년 12월 24일 허씨(許氏) 성을 가진 상중(喪中)에 있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로 보인다.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인사는 줄입니다. 차마 당하지 못할 변을 당하고, 차마 떠나지 못할 형세에 떠나니 정으로 비록 위로하려 하나 이미 개인적이지도 않은 듯하고, 세상이 쓸데없다 끊어버리니 인정이 이렇습니다. 

    대개 다친 것이 작지 않고, 사는 곳이 소홀해지나 그것이 병이 되지는 않습니다. 슬픔과 근심의 회포는 아직 어디에도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중에 억지로 깃들어 살며 도리어 집에는 짐짓 별일이 없습니다. 

    이른바 혼사의 날은 점차 다가오는데 일상의 모든 일이 아직도 되지 않아 여러 집안 행사를 잡아서 버리려 해도 할 수 없으니 어찌할까요? 

    산소의 일을 정하는 것은 어떻게 할지 따를 수도 없습니다. 결정은 모름지기 충분하고 상세하게 의논하기를 바랍니다. 이른바 더러운 것이 낀다고 하는데 오히려 이제 윗가지(上枝)도 내산(奈山)도 다 오지 않는다고 하니 괴상하고 놀랍습니다. 

    돌아와서(還上) 어찌 욕을 당할지 생각하니 이 또한 밤낮으로 근심이 될 뿐입니다. 또 반드시 어떻게 일을 주관하여 만들지, 어느 시내가 어떤 도움이 되는지? 확실히 묘수가 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방법이 또한 한 가지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얽힌 삼실 같아 가슴속 품은 회포의 만 가지 중 하나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억지로라도 미음을 드시어 몸이 상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 갖추지 못합니다. 살펴주소서.


    임오년(1582) 동짓달 스무 나흘에 상복 입은 사람 정세아는 조아립니다.” 



    편지에 뒷면에 적인 ‘許 喪人 苫次 省式封(허상인 점차)’으로 보아 허씨(許氏) 성을 가진 상중에 있는 지인에게 보낸 편지로 점차(苫次)는 ‘상중에 거처하는 여막(廬幕)이나 지인이 상중에 있을 때 이름 아래 쓰는 형식’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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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3. 편지 뒷면에 받는 사람을 기록 부분에 許 喪人 苫次 省式封(허 상인 점차 생식봉)이 기록되어 있다.


     

    편지를 봉하는 부분에서 일반적으로 ‘근봉(謹封)’이라 하여 ‘근(謹)’이라는 예의를 차린 글을 쓰나, 수신자나 발신자 모두 상중에 있는 상황이라 ‘생식(省式)’ 즉 ‘인사치레를 생략한다’라는 의미의 말을 쓴 것으로 보인다.  


    영천역사박물관은 “그동안 강의공 정세아(鄭世雅)의 관련 자료 부족을 고민해 온 결과, 이 자료를 찾아옴으로써 영천 임란사에 부족하나마 작은 공백이나마 메울 수 있어 큰 의미를 두고 있다.”라고 전했다.



    · 작 성 : 영천역사박물관장 지봉스님

    · 원문 해제 : 고문헌연구실장 권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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